맨위로가기

세키가하라 전투 (소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키가하라 전투 (소설)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로, 1600년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대립, 그리고 전국 다이묘들의 동군과 서군으로의 분열을 다룬다. 소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혼다 마사노부, 이시다 미쓰나리, 시마 사콘 등 주요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책략, 그리고 각 다이묘들의 정세를 대국적인 시점으로 그려낸다. 1966년에 간행되었으며, 2002년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1981년에는 드라마로, 2017년에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소재로 한 작품 -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26권의 소설로, 어린 시절 인질 생활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력을 거쳐 에도 막부를 세우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과정을 담아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소재로 한 작품 - 사나다마루 (드라마)
    2016년 NHK에서 방영된 타이가 드라마 사나다마루는 센고쿠 시대 사나다 가문을 배경으로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의 생애를 그린 드라마로, 사카이 마사토가 주연을 맡고 미타니 코키가 각본을 썼으며 50화로 구성되어 평균 시청률 16.6%를 기록했다.
  • 1964년 소설 - 타올라라 검
    시마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타올라라 검》은 다마 시대부터 하코다테 전쟁까지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의 일생과 고뇌,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 믹스 작품들을 다룬다.
  • 1964년 소설 - 찰리와 초콜릿 공장
    로알드 달의 아동 문학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가난한 소년 찰리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 견학 티켓을 얻어 겪는 이야기로, 웡카의 후계자를 찾는 과정과 어린이들의 욕심을 통해 교훈을 주며 다양한 매체로 각색되었으나 일부 비판도 존재하는 작품이다.
  • 시바 료타로의 소설 - 료마가 간다
    《료마가 간다》는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로,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를 다루며, 료마를 혁신적인 영웅으로 묘사하여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역사적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 시바 료타로의 소설 - 타올라라 검
    시마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타올라라 검》은 다마 시대부터 하코다테 전쟁까지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의 일생과 고뇌,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 믹스 작품들을 다룬다.
세키가하라 전투 (소설)
책 정보
제목관가하라
원제関ヶ原
저자司馬遼太郎
출판일1966년 10월 25일
출판사신초샤
장르소설
언어일본어

2. 역사적 배경

다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 발단이 되어, 고다이로의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부교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항쟁은 일본 전국으로 비화한다. 그들의 항쟁은 전국의 제 다이묘를 동서로 갈라, 그들을 천하의 주인을 판가름 하는 전장 세키가하라로 몰아간다.

이야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의 가신 시마 사콘의 4명의 인간 군상과 모략전을 중심으로 그려지지만 그 대립구도만이 아닌, 우에스기·모리·시마즈·나베시마·사나다·죠소카베 등 각지의 다이묘의 정세도 곳곳에 배치하여, 대국적인 시점으로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려내고 있다.

주로 「고궁의 암」부터 「히데요시의 죽음」까지.

16세기 말, 당시 일본 60여 주를 통일하고 천하인으로 군림해 온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는 아직 어렸기에, 여러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혼란의 중심 인물이 될 것이라고 여러 봉건 영주들이 주목한 인물은 오다이로 중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온화한 인물로 알려진 이에야스였지만, 히데요시가 병석에 누운 것을 계기로 천하를 빼앗으려는 야망을 드러내고 은밀히 책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부교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그 야망으로부터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로 묘사되고 있으며, 엄격할 정도로 결백한 성격 때문에 「へいくゎい者」(오만한 자)라는 악명을 얻었지만, 도요토미 정권의 쇠퇴 속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부하려는 여러 봉건 영주들의 추악함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마침내 도요토미 가문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도리와 사람들의 마음을 위해서라도 의를 세우고 불의를 없애겠다는 신념으로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와 싸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2.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권력 공백

16세기 말, 일본 60여 주를 통일하고 천하인으로 군림했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여러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혼란의 중심 인물이 될 것이라고 여러 봉건 영주들이 주목한 인물은 오대로 중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였다. 온화한 인물로 알려진 이에야스였지만, 히데요시가 병석에 누운 것을 계기로 천하를 빼앗으려는 야망을 드러내고 은밀히 책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부교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그 야망으로부터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로 묘사되고 있으며, 엄격할 정도로 결백한 성격 때문에 「へいくゎい者」(오만한 자)라는 악명을 얻었지만, 도요토미 정권의 쇠퇴 속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부하려는 여러 봉건 영주들의 추악함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마침내 도요토미 가문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도리와 사람들의 마음을 위해서라도 의를 세우고 불의를 없애겠다는 신념으로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와 싸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2. 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상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오사카성 서의 마루에 머물며 도요토미 가문의 정사를 사실상 장악했다. 이에야스는 호쿠리쿠를 지배하는 마에다 씨를 암살 음모 혐의로 규탄했으나, 마에다 씨는 순종을 맹세하여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씨에게 반란 혐의를 씌웠다.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위해 주력군과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동국으로 진출했고, 이 틈을 타 이이치 성은 도요토미 정권의 명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거병을 촉구했다. 이이치 성은 이에야스가 변방 세력 토벌을 명분으로 야전 체제를 구축하고 막부를 열려는 의도로 파악했다.

이이치 성은 우에스기 씨와 연합하여 이에야스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는 이에야스의 예측대로였다. 이에야스는 이이치 성에게 역적의 낙인을 찍고, 반 도쿠가와 세력을 일거에 토벌하려 했다. 이에야스는 시모쓰케국코야마 평정에서 종군 장수들의 협력을 얻어 서국으로 군대를 돌려 이이치 성과의 대결에 나섰다.

2. 3. 이시다 미쓰나리의 반발

3. 주요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그의 유훈을 깨고 미쓰나리를 도발하여,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반 미쓰나리파의 다이묘를 다수 끌어들여 천하를 빼앗을 야망을 품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너구리 할배'의 이미지로 매우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혼다 마사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주종관계를 '수어지교'와 비유될 정도로 이에야스에게 소중한 모신이다. 이에야스 이상으로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며, 수많은 책략을 이에야스와 몇 번이고 다듬어 미쓰나리를 동요하게 한다. 시마 사콘에게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이시다 미쓰나리

:도요토미 가의 충실한 관료였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노골적으로 천하에의 야심을 드러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에게 붙어 보신을 꾀하는 여러 다이묘들을 증오한다. 정의를 중시한 나머지 융통성이 떨어지며, 그 때문에 많은 손해를 입는 남자로서 그려진다.

;시마 사콘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높은 봉록을 받는 미쓰나리 제일의 가신이다. 정공법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주인과 달리, 현실주의자로 이에야스의 암살도 몇 차례 시도한다. 언제나 미쓰나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타이르며 질책하기도 하는, 미쓰나리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나오에 가네쓰구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중신이다. 의를 중시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미쓰나리와 잘 맞는 친우로 그려진다. 이에야스를 아이즈(会津)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콘과 모의하여, 유명한 '나오에 장(直江状)'을 이에야스에게 보내, 이에야스를 도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쓰메

:마사노부의 책략에 의해, 미쓰나리와 요도도노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미쓰나리에게 보내진 소녀이다. 그러나 차츰 미쓰나리의 인간성에 이끌려, 미쓰나리와 남녀의 관계를 갖기에 이른다. 그 때문에 사콘에게 꺼려야할 존재로 인식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출가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3. 1.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그의 유훈을 깨고 미쓰나리를 도발하여,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하는 반 미쓰나리파의 다이묘를 다수 끌어들여 천하를 빼앗을 야망을 품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너구리 할배'의 이미지로 매우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혼다 마사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주종관계를 '수어지교'와 비유될 정도로 이에야스에게 소중한 모신이다. 이에야스 이상으로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며, 수많은 책략을 이에야스와 몇 번이고 다듬어 미쓰나리를 동요하게 한다. 시마 사콘에게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이시다 미쓰나리

:도요토미 가의 충실한 관료였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노골적으로 천하에의 야심을 드러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에게 붙어 보신을 꾀하는 여러 다이묘들을 증오한다. 정의를 중시한 나머지 융통성이 떨어지며, 그 때문에 많은 손해를 입는 남자로서 그려진다.

;시마 사콘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높은 봉록을 받는 미쓰나리 제일의 가신이다. 정공법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주인과 달리, 현실주의자로 이에야스의 암살도 몇 차례 시도한다. 언제나 미쓰나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타이르며 질책하기도 하는, 미쓰나리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나오에 가네쓰구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중신이다. 의를 중시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미쓰나리와 잘 맞는 친우로 그려진다. 이에야스를 아이즈(会津)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콘과 모의하여, 유명한 '나오에 장(直江状)'을 이에야스에게 보내, 이에야스를 도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3. 1. 1.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그의 유훈을 깨고 미쓰나리를 도발하여,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반(反) 미쓰나리파 다이묘를 다수 끌어들여 천하를 빼앗을 야망을 품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너구리 할배'의 이미지로 매우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1])[2]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도요토미 가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을 이용하여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무단파 다이묘들을 회유하고, 문치파의 중심 인물인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대립을 부추겨 도요토미 가문을 교묘하게 분열시킨다. 이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비열한 술책으로 볼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전투 시작 전부터 서군 장수들에게 치밀한 책략을 사용하여 철저한 준비를 거듭하며 동군의 승리가 확실해지는 단계까지 정세를 유도하고, 거의 서류 작업을 하는 듯한 태도로 전장에 나서 승리를 거머쥔다. “노련하다”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한 듯한 백전노장이다. 수많은 군대가 싸우는 전장을 누비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헤쳐나온 그의 정치력은 당대 최고였으며, 그 막강한 힘을 이용하여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천하를 빼앗으려 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혼다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의 최측근 모신으로, 이에야스 이상으로 노회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심복인 시마 사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타다의 보좌역으로 종군했으나,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발목이 잡혀 본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이이 나오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있어 혼다 마사노부가 정치적인 책사였다면 군사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인물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서는 최전선에서 토쿠가와 가문의 직신으로 선봉에 섰다.

3. 1. 2. 혼다 마사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주종관계를 '수어지교'와 비유될 정도로 이에야스에게 소중한 모신이다. 이에야스 이상으로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며, 수많은 책략을 이에야스와 몇 번이고 다듬어 이시다 미쓰나리를 동요하게 한다. 시마 사콘에게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3. 1. 3. 이이 나오마사

이이 나오마사에 대한 내용은 주어진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섹션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빈 텍스트를 출력합니다.

3. 1. 4. 도요토미 가신 (무단파)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운 무단파(武断派) 다이묘였다.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文治派)와 갈등을 빚었다. 특히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명나라에까지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는, 무골(武骨)한 장병들을 얕보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단순하고 격정적인 성격으로, 이시다 미쓰나리가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속여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에 넘어가 동군에 가담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도요토미 가신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권력 장악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히고국에 남아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규슈의 서군 다이묘들을 제압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선봉대장으로 활약하며 동군의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을 초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 통일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천하를 평정한 자부심이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나,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장래를 염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는 비극적인 아이러니였다.

3. 1. 5. 그 외 동군 가담 인물

도도 고토라는 이요 국에 영지를 가진 다이묘로, 원래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섬겼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어 다이묘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번 주군을 바꾼 인물로,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음에도 도요토미 가문을 포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했다. 이에야스의 앞잡이처럼 첩보 활동과 책략 공작에 종사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는 이세 국에 큰 영지를 받았다.

야마우치 카츠토요는 도토미 국 가케가와의 다이묘였다. 원래는 오다 가문의 평범한 무사였으나,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도카이도 지역에 신뢰할 수 있는 다이묘를 배치하는 전략으로 카츠토요에게 가케가와 성을 주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을 포기하고 이에야스를 따랐다. 고야마 평정에서 영지와 성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다른 다이묘들도 따랐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이 없었음에도 카츠토요에게 도사 국을 주었다.

3. 2. 서군

도요토미 가의 충실한 관료였던 이시다 미쓰나리히데요시 사후, 노골적으로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에게 빌붙어 자신의 안위만을 꾀하는 여러 다이묘들을 증오했다. 정의를 중시했지만 융통성이 부족하여 많은 손해를 보는 인물로 그려진다.

히데요시의 총신이자 오봉행(五奉行) 중 한 명인 미쓰나리는 오미국 사카타군 지사미 집안 출신이다. 어린 시절 절의 승려였으나, 히데요시에게 총명함을 인정받아 소년(小姓)으로 발탁되었고, 성장하여 가신이 되었다. 수리에 능한 능리로서 히데요시에게 중용되었으며, 도요토미 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를 탄핵하고 반(反)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하여 십만 대군을 조직,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켰다.

미쓰나리는 도리와 신의를 존중하고, 배신이 만연한 난세에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였다. 이에야스를 "노간(老奸)"이라 부르며 증오했고, 자기 보신만 생각하며 이에야스에게 아첨하는 다이묘들을 경멸했다. 하지만 명민한 두뇌를 가졌음에도 관념론과 윤리에만 치우쳐 객관적인 현실 인식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상을 독선적으로 관철하려 했고, "헤이쿠와이자"(횡포한 자)라는 평을 받았다. 타고난 검찰관적 성격으로 법 이론을 절대시하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반발을 샀으며, 사람을 깔보는 버릇도 있었다. 심복인 시마 사콘은 미쓰나리가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요소를 모두 갖췄다고 평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는 서군 십만의 실질적인 지휘자였으나, 낮은 신분 때문에 직접 지휘 가능한 병력이 적었고, 인망도 부족하여 군 통솔에 어려움을 겪었다. 방첩과 책략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여 이에야스의 교란 작전을 막지 못했고, 수많은 내응자를 내며 서군은 내부에서 와해되었다. 결국 본전에서 패배한 후 재기를 도모하다 체포되어,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높은 봉록을 받는 미쓰나리 제일의 가신이다. 정공법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주인과 달리, 현실주의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암살도 몇 차례 시도한다. 언제나 미쓰나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타이르며 질책하기도 하는, 미쓰나리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미쓰나리의 심복. 예전에는 야마토국의 츠츠이씨에 시타다이쇼(侍大将)로서 섬기며, 정략과 합전의 천재로 명성을 떨쳤다. 그 재능을 높이 산 미쓰나리는, 츠츠이가를 그만두고 오미에 은거한 사콘을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하여, 마침내 자신의 지행의 거의 절반을 내주고 가로로 모셨다. 정·군 모두 뛰어난 능력 때문에 이미 천하의 명사로 이름이 높았고, 거성인 사와야마성과 마찬가지로 낮은 신분의 미쓰나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미쓰나리에게 뛰어난 것이 두 가지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성"이라고 읊어졌다.

예전 신겐 재세 중의 다케다가에 손님으로 몸을 의탁했고, 이에야스가 신겐에게 큰 패배를 당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하여, 일기당천으로 패주한 이에야스를 추격했기 때문에, 이에야스와는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음흉한 책략을 잘하는 이에야스의 성격을 싫어하는 한편 미쓰나리의 소년 같은 어리석음을 걱정하면서도 사랑했고, 정신론에 치우치기 쉬운 미쓰나리를 전술가로서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좌했다.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질책하며 스승처럼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사콘을 미쓰나리도 의지했고, 마치 마음이 맞는 삼촌처럼 대해졌다.

세키가하라에서는 귀신 같은 용맹함으로 전장을 마음껏 누비며, 동군 장병들을 크게 두렵게 했다. 하지만 코바야카와 부대의 배신으로 패전이 결정적이 되자 이제는 끝이라고 각오를 굳히고, 얼마 안 되는 가신들과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에 결사의 돌격을 시도하여 전사했다.

에치젠국츠루가를 영유하는 다이묘이다. 원래는 히데요시의 소년으로, 히데요시에게 총명함을 사랑받아 눈에 들었고, 장성하여 후에 다이묘로 발탁되었다. 미쓰나리와는 소년 시절부터 친구였고, 나병에 걸린 후에도 개의치 않고 대해주는 미쓰나리에게 강한 우정을 느껴, 절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우의를 맺었다. 미쓰나리의 거병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만류했지만, 결의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받아들이고, 미쓰나리와 생사를 함께하기 위해 전장에 선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나병이 진행되어 피부가 썩어 갑옷도 입지 못하는 상태로 양쪽 눈도 완전히 실명했지만, 판여(板輿)를 타고 전장을 돌아다니며 지휘를 했다. 예전에 히데요시에게 "백만의 군대를 맡아보고 싶다"라고 인정받은 대로 그 채배는 훌륭한 것이었고, 서군의 많은 병사가 전황을 방관하여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용맹하게 싸워, 동군을 교란시켰다. 그런데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당하고, 동군과의 전투에서 대형이 늘어진 곳을 공격받아 큰 타격을 입는다. 더욱이 호응하여 배신한 반역 장수들의 부대에도 포위되어, 잠시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내 기력이 다하여 자결했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요 국(伊予国)을 다스리던 다이묘(大名)였다. 원래 모리 씨의 외교 승려였으나, 오다 노부나가 재임 시절부터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예견하고 모리 가문의 외교를 히데요시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천하 획득에 기여했다. 도요토미 정권이 성립된 후에는 히데요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외교 참모가 되었고, 승려 신분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에야스의 부상을 예상했지만, 자신이 쌓았다고 생각하는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애착으로 미쓰나리의 거병 계획에 참여했다. 외교 고문으로서 모리 가문의 서군(西軍) 참가를 결정하고, 당주인 테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에 앉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이에야스 본진 바로 뒤편 남궁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산 정상에 포진한 모리 군 부대를 이끄는 기카와 히로이에의 내응(内応) 의혹이 제기되어 견제를 받으며 움직임이 제한되었고, 결국 전투 한번 하지 못한 채 패배를 맞이했다. 서군 붕괴와 함께 도주했지만 곧 체포되어, 미쓰나리와 마찬가지로 로쿠죠가와라(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중신(重臣)이었다. 정략과 전략에 모두 뛰어난 인물로, 모리 가문의 군사를 총괄했다. 일찍부터 이에야스의 승리를 예측하고 동군(東軍) 가담을 주장했지만, 외교를 총괄하는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거절당했다. 서군이 승리하더라도 도요토미 가문에는 정권 담당 능력이 없고, 평범한 능력의 테루모토는 난세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충성하는 것이 모리 가문 존속의 길이라고 판단, 독단으로 밀사를 보내 동군에 내응을 약속했다.

세키가하라에서는 테루모토의 양자인 히데모토의 보좌역으로 모리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이에야스 본진 후방의 남궁산에 진을 치고도 군대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전황을 방관했다. 내응을 모르고 군대를 움직이려는 히데모토를 붙잡고, 미쓰나리의 독촉에도 "도시락을 먹는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움직이지 않아, 결국 도시락을 먹는 사이에 전투가 끝났다. 모리 부대의 이러한 행동은 전후 "재상전의 빈 도시락"(재상=히데모토)이라고 조롱받았다.

나오에 가네쓰구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중신이다. 의를 중시하는 성격 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막역한 친우로 그려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이즈(会津)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마 사콘과 모의하여, 유명한 '나오에 장'을 이에야스에게 보내 도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나오에 가네쓰구는 뛰어난 군략가로, 우에스기 겐신을 소년 시절부터 섬기며 군법과 의협을 존중하는 성격을 계승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는 의를 중시하는 공통점 때문에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 야욕에 분노하여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켰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로 한때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평범 이하의 어리석은 자질과 무분별한 행동으로 히데요시의 미움을 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 접근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제안에 흔들렸으나,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협박에 굴복하여 동군에 가담, 서군 궤멸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薩摩)의 다이묘이자 명장으로, 조선 원정에서 명나라와 조선 군대를 두렵게 한 무용을 떨쳤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에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의사소통 문제로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전투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서군 패배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스쳐 지나가는 놀라운 후퇴전을 감행하여 영지를 보전받았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비젠(備前)의 다이묘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양자로,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러나 정치 감각이 부족하고 귀공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최대 병력을 이끌고 분전했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패배하자 전장에서 도망쳤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시나노(信濃)의 소다이묘로, 교묘한 계략과 뛰어난 전술로 명성을 떨쳤다.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시나노(信濃)와 카이(甲斐) 두 나라를 약속받고 서군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들 요시노부와 함께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대를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3. 2. 1. 이시다 미쓰나리

도요토미 가의 충실한 관료였던 이시다 미쓰나리히데요시 사후, 노골적으로 천하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에게 빌붙어 자신의 안위만을 꾀하는 여러 다이묘들을 증오했다. 정의를 중시했지만 융통성이 부족하여 많은 손해를 보는 인물로 그려진다.

히데요시의 총신이자 오봉행(五奉行) 중 한 명인 미쓰나리는 오미국 사카타군 지사미 집안 출신이다. 어린 시절 절의 승려였으나, 히데요시에게 총명함을 인정받아 소년(小姓)으로 발탁되었고, 성장하여 가신이 되었다. 수리에 능한 능리로서 히데요시에게 중용되었으며, 도요토미 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를 탄핵하고 반(反)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하여 십만 대군을 조직,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켰다.

미쓰나리는 도리와 신의를 존중하고, 배신이 만연한 난세에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였다. 이에야스를 "노간(老奸)"이라 부르며 증오했고, 자기 보신만 생각하며 이에야스에게 아첨하는 다이묘들을 경멸했다. 하지만 명민한 두뇌를 가졌음에도 관념론과 윤리에만 치우쳐 객관적인 현실 인식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상을 독선적으로 관철하려 했고, "헤이쿠와이자"(횡포한 자)라는 평을 받았다. 타고난 검찰관적 성격으로 법 이론을 절대시하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반발을 샀으며, 사람을 깔보는 버릇도 있었다. 심복인 시마 사콘은 미쓰나리가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요소를 모두 갖췄다고 평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는 서군 십만의 실질적인 지휘자였으나, 낮은 신분 때문에 직접 지휘 가능한 병력이 적었고, 인망도 부족하여 군 통솔에 어려움을 겪었다. 방첩과 책략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여 이에야스의 교란 작전을 막지 못했고, 수많은 내응자를 내며 서군은 내부에서 와해되었다. 결국 본전에서 패배한 후 재기를 도모하다 체포되어,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3. 2. 2. 시마 사콘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높은 봉록을 받는 미쓰나리 제일의 가신이다. 정공법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주인과 달리, 현실주의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암살도 몇 차례 시도한다. 언제나 미쓰나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타이르며 질책하기도 하는, 미쓰나리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미쓰나리의 심복. 예전에는 야마토국의 츠츠이씨에 시타다이쇼(侍大将)로서 섬기며, 정략과 합전의 천재로 명성을 떨쳤다. 그 재능을 높이 산 미쓰나리는, 츠츠이가를 그만두고 오미에 은거한 사콘을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하여, 마침내 자신의 지행의 거의 절반을 내주고 가로로 모셨다. 정·군 모두 뛰어난 능력 때문에 이미 천하의 명사로 이름이 높았고, 거성인 사와야마성과 마찬가지로 낮은 신분의 미쓰나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미쓰나리에게 뛰어난 것이 두 가지 있으니 시마 사콘과 사와야마성"이라고 읊어졌다.

예전 신겐 재세 중의 다케다가에 손님으로 몸을 의탁했고, 이에야스가 신겐에게 큰 패배를 당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도 참전하여, 일기당천으로 패주한 이에야스를 추격했기 때문에, 이에야스와는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음흉한 책략을 잘하는 이에야스의 성격을 싫어하는 한편 미쓰나리의 소년 같은 어리석음을 걱정하면서도 사랑했고, 정신론에 치우치기 쉬운 미쓰나리를 전술가로서의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좌했다.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질책하며 스승처럼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사콘을 미쓰나리도 의지했고, 마치 마음이 맞는 삼촌처럼 대해졌다.

세키가하라에서는 귀신 같은 용맹함으로 전장을 마음껏 누비며, 동군 장병들을 크게 두렵게 했다. 하지만 코바야카와 부대의 배신으로 패전이 결정적이 되자 이제는 끝이라고 각오를 굳히고, 얼마 안 되는 가신들과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에 결사의 돌격을 시도하여 전사했다.

3. 2. 3. 오타니 요시쓰구

에치젠국츠루가를 영유하는 다이묘이다. 원래는 히데요시의 소년으로, 히데요시에게 총명함을 사랑받아 눈에 들었고, 장성하여 후에 다이묘로 발탁되었다. 미쓰나리와는 소년 시절부터 친구였고, 나병에 걸린 후에도 개의치 않고 대해주는 미쓰나리에게 강한 우정을 느껴, 절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우의를 맺었다. 미쓰나리의 거병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만류했지만, 결의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받아들이고, 미쓰나리와 생사를 함께하기 위해 전장에 선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나병이 진행되어 피부가 썩어 갑옷도 입지 못하는 상태로 양쪽 눈도 완전히 실명했지만, 판여(板輿)를 타고 전장을 돌아다니며 지휘를 했다. 예전에 히데요시에게 "백만의 군대를 맡아보고 싶다"라고 인정받은 대로 그 채배는 훌륭한 것이었고, 서군의 많은 병사가 전황을 방관하여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용맹하게 싸워, 동군을 교란시켰다. 그런데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당하고, 동군과의 전투에서 대형이 늘어진 곳을 공격받아 큰 타격을 입는다. 더욱이 호응하여 배신한 반역 장수들의 부대에도 포위되어, 잠시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내 기력이 다하여 자결했다.

3. 2. 4. 모리 가문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요 국(伊予国)을 다스리던 다이묘(大名)였다. 원래 모리 씨의 외교 승려였으나, 오다 노부나가 재임 시절부터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예견하고 모리 가문의 외교를 히데요시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천하 획득에 기여했다. 도요토미 정권이 성립된 후에는 히데요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외교 참모가 되었고, 승려 신분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에야스의 부상을 예상했지만, 자신이 쌓았다고 생각하는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애착으로 미쓰나리의 거병 계획에 참여했다. 외교 고문으로서 모리 가문의 서군(西軍) 참가를 결정하고, 당주인 테루모토를 서군 총대장에 앉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이에야스 본진 바로 뒤편 남궁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산 정상에 포진한 모리 군 부대를 이끄는 기카와 히로이에의 내응(内応) 의혹이 제기되어 견제를 받으며 움직임이 제한되었고, 결국 전투 한번 하지 못한 채 패배를 맞이했다. 서군 붕괴와 함께 도주했지만 곧 체포되어, 미쓰나리와 마찬가지로 로쿠죠가와라(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의 중신(重臣)이었다. 정략과 전략에 모두 뛰어난 인물로, 모리 가문의 군사를 총괄했다. 일찍부터 이에야스의 승리를 예측하고 동군(東軍) 가담을 주장했지만, 외교를 총괄하는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거절당했다. 서군이 승리하더라도 도요토미 가문에는 정권 담당 능력이 없고, 평범한 능력의 테루모토는 난세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충성하는 것이 모리 가문 존속의 길이라고 판단, 독단으로 밀사를 보내 동군에 내응을 약속했다.

세키가하라에서는 테루모토의 양자인 히데모토의 보좌역으로 모리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이에야스 본진 후방의 남궁산에 진을 치고도 군대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전황을 방관했다. 내응을 모르고 군대를 움직이려는 히데모토를 붙잡고, 미쓰나리의 독촉에도 "도시락을 먹는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움직이지 않아, 결국 도시락을 먹는 사이에 전투가 끝났다. 모리 부대의 이러한 행동은 전후 "재상전의 빈 도시락"(재상=히데모토)이라고 조롱받았다.

3. 2. 5. 그 외 서군 가담 인물

나오에 가네쓰구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중신이다. 의를 중시하는 성격 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와 막역한 친우로 그려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이즈(会津)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마 사콘과 모의하여, 유명한 '나오에 장'을 이에야스에게 보내 도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나오에 가네쓰구는 뛰어난 군략가로, 우에스기 겐신을 소년 시절부터 섬기며 군법과 의협을 존중하는 성격을 계승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는 의를 중시하는 공통점 때문에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 야욕에 분노하여 이시다 미쓰나리와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켰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로 한때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평범 이하의 어리석은 자질과 무분별한 행동으로 히데요시의 미움을 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 접근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제안에 흔들렸으나,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협박에 굴복하여 동군에 가담, 서군 궤멸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薩摩)의 다이묘이자 명장으로, 조선 원정에서 명나라와 조선 군대를 두렵게 한 무용을 떨쳤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에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의사소통 문제로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전투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서군 패배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스쳐 지나가는 놀라운 후퇴전을 감행하여 영지를 보전받았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비젠(備前)의 다이묘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양자로,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러나 정치 감각이 부족하고 귀공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최대 병력을 이끌고 분전했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패배하자 전장에서 도망쳤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시나노(信濃)의 소다이묘로, 교묘한 계략과 뛰어난 전술로 명성을 떨쳤다.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시나노(信濃)와 카이(甲斐) 두 나라를 약속받고 서군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들 요시노부와 함께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대를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3. 3. 그 외 주요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그의 유훈을 깨고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발하여,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하는 반 미쓰나리파의 다이묘를 다수 끌어들여 천하를 빼앗을 야망을 품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너구리 할배'의 이미지로 매우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가의 충실한 관료였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노골적으로 천하에의 야심을 드러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에게 붙어 보신을 꾀하는 여러 다이묘들을 증오한다. 정의를 중시한 나머지 융통성이 떨어지며, 그 때문에 많은 손해를 입는 남자로서 그려진다.

혼다 마사노부는 이에야스와의 주종관계를 '수어지교'와 비유될 정도로 이에야스에게 소중한 모신이다. 이에야스 이상으로 노회한 인물로 그려지며, 수많은 책략을 이에야스와 몇 번이고 다듬어 미쓰나리를 동요하게 한다. 사콘에게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시마 사콘은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높은 봉록을 받는 미쓰나리 제일의 가신이다. 정공법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인 주인과 달리, 현실주의자로 이에야스의 암살도 몇 차례 시도한다. 언제나 미쓰나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때로는 타이르며 질책하기도 하는, 미쓰나리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하츠메는 마사노부의 책략에 의해, 미쓰나리와 요도도노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미쓰나리에게 보내진 소녀이다. 그러나 차츰 미쓰나리의 인간성에 이끌려, 미쓰나리와 남녀의 관계를 갖기에 이른다. 그 때문에 사콘에게 꺼려야할 존재로 인식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출가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나오에 가네쓰구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중신이다. 의를 중시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미쓰나리와 잘 맞는 친우로 그려진다. 이에야스를 아이즈(会津)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콘과 모의하여, 유명한 '나오에 장(直江状)'을 이에야스에게 보내, 이에야스를 도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3. 3. 1. 도요토미 가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 통일을 달성한 영걸이다. 오와리의 농민 출신으로 비할 데 없는 지략으로 천하인의 자리에 올랐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권력에 자만하여 무모한 외정(임진왜란)을 시도하거나 사치스러운 건축에 빠지는 등, 여러 다이묘와 백성을 크게 곤궁하게 하여 원망을 샀다. 도카이 지방의 거대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에 순응시켜 신하로 삼았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을 두려워하여 잠재적 위협으로 항상 경계했다. 노쇠하여 병상에 눕게 된 후에는 이에야스가 자신의 사후에 아들 히데요리를 해치고 천하를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적어도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장수하고 싶어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사랑하는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숨을 거둔다.

기타노쇼는 히데요시의 정실이다. 그 총명한 기질로 젊은 시절부터 히데요시를 돕고, 현명한 여인으로서 도요토미 가의 창건에 크게 기여했다.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많은 가신들에게 존경받았지만,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같은 무용의 인물을 좋아하고 자신의 고향인 오와리 출신자를 편애하는 버릇이 있었다. 또한 도요토미의 천하가 안정되면서 관리들이 세력을 떨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그 밑에는 정권 중추에서 소외된 무장 가신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벌이 형성되었다. 한편,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 밑에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대표로 하는 관리들이 벌을 형성하게 되고, 두 벌의 대립은 무단파와 문치파의 다툼으로 발전하여 도요토미 가문의 기반을 흔들게 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죽음 직후부터 기타노쇼에게 접근하여, 과부를 위로하는 척 다양한 후의를 베풀어 신임을 얻으려고 노력했고, 그녀를 따르는 무단파 다이묘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요도도노는 히데요시의 측실이자, 히데요시 사후 (명목상의) 천하의 주인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이다. 무단파·오와리 출신자를 중심으로 한 동군이 기타노쇼를 따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도요토미 정권 중추의 문치파·오미 출신자(주로 서군에 가담)는 요도도노를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있다.

3. 3. 2. 기타 인물

마에다 도시이에는 오대로의 중진으로, 호쿠리쿠를 다스리는 거대 다이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며, 히데요시는 그를 고위직에 앉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의 후견을 부탁받고 죽었다. 미쓰나리도 가장 신뢰했던 인물이었지만, 노쇠하여 히데요시의 죽음 이듬해에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앞두고 도요토미 가문에 순절하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부인 호슈인은 이미 천하의 실권이 이에야스에게 넘어간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이에야스에게 공순을 맹세하도록 하고, 자신은 스스로 인질이 되어 가츠야스에게 가서 마에다 가문의 존속을 도모했다.

하츠메는 미쓰나리의 애첩이다. 원래는 후지도 다카토라 가신의 딸로 요도도노의 시녀였지만, 다카토라의 계략으로 미쓰나리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미쓰나리의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미쓰나리가 오봉행을 사임한 후에는 함께 오미로 오는 것을 권유받지만, 정실 부인의 명령을 받는 것이 괴로워 미쓰나리의 배려로 교토에 거주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 시작되자 미쓰나리의 안위를 걱정하여 서군의 전선 기지인 미노 오가키성을 찾아가기도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종결 후에는 비구니가 되어 미쓰나리의 혼을 위로하며 지냈다.

구로다 요스이부젠국 나카츠의 다이묘였다. 과거에는 히데요시의 군사로 활약하며 천하 통일 사업에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경계받아 규슈에 작은 영지를 받고 은거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스스로 천하를 차지할 야망을 품고 동군에 속하면서도, 이시가키하라 전투에서 규슈 서군 다이묘 영지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본전이 하루 만에 끝나면서 그의 도전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앞잡이가 되어 서군 내부를 교란시켜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안겨주게 되었다. 이야기 마지막에 요스이는 하츠메의 암자를 방문하여 미쓰나리의 행동을 칭찬하고 그의 혼을 위로했다.

4. 전투의 전개

다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고다이로의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부교 이시다 미쓰나리의 갈등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의 갈등은 전국의 다이묘들을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끌었다.

이야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의 가신 시마 사콘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우에스기, 모리, 시마즈, 나베시마, 사나다, 조소카베 등 여러 다이묘 가문의 정세도 함께 다루면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폭넓게 묘사한다.

4. 1. 전초전

4. 1. 1. 도요토미 정권 내 갈등

주로 「하카타의 기요마사」부터 「세다의 이별」까지의 내용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야망을 드러냈다.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 도요토미 정권에는 두 개의 정치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전장을 누비며 도요토미 가문의 창건을 도왔던 무단파였고, 다른 하나는 도요토미 정권의 통치가 자리 잡으면서 정권 운영을 위해 중용되었던 문치파였으며, 두 세력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다. 도요토미 가문의 약화를 노리는 이에야스는 이 점을 이용하여 배후에서 대립을 부추겼다. 특히 문치파의 중심 인물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자신이 길들인 무단파 다이묘를 싸움붙여, 양 파의 항쟁은 소규모 전투가 발생할 정도로 발전했다.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단파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계략을 간파하고, 여기서 자신이 죽으면 곤란한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요청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위기를 넘긴 미쓰나리였지만, 고부교의 직책을 사임해야 했고, 중앙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후 영지인 오미국 사와야마성에 은거한 미쓰나리는 히데요시 사후의 혼란을 예상하여 축성한 견고한 성에 틀어박혀,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이에야스 타도의 기회를 기다렸다.

4. 1. 2. 이에야스의 세력 확장

이이치 성이 은퇴한 직후, 이에야스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머물며 도요토미 가의 가정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했다. 이에야스는 호쿠리쿠를 다스리는 마에다 씨가 이에야스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했고, 세상은 곧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 소란스러워졌다. 이는 사실무근의 누명이었지만, 마에다 씨는 끊임없이 몸을 낮추어 이에야스에게 순종을 맹세했고, 호쿠리쿠를 둘러싼 혼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다음으로 이에야스는 아이즈우에스기 씨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웠다. 순종을 거부하는 우에스기 씨에 대해,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을 위해 자신의 주력군과 제후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동국으로 진출하자, 이이치 성은 도요토미 정권의 명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이에야스를 토벌하기 위해 거병했다. 이이치 성은 이 시점에서 이에야스의 목표가 변방 세력에 토벌군을 파견하여 야전 체제 그대로 막부를 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예측에 따라 우에스기 씨와 암묵적으로 연합하여, 이에야스가 동국에 주력군을 파견한 후 자신이 기나이에서 거병하고, 우에스기 씨와 함께 이에야스를 협공한다는 대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봉기한 이이치 성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이에야스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이에야스의 진정한 목표는 자신의 아이즈 정벌에 호응하여 병력을 일으킬 이이치 성에게 역적의 낙인을 찍고, 이이치 성과 그의 깃발 아래 모인 반 도쿠가와 대명들을 일거에 토벌하는 것이었다. 이이치 성의 봉기에 따른 시모쓰케국코야마 평정에서 많은 종군 장수들의 협력을 얻어낸 이에야스는, 반항 세력을 토벌하고 일거에 천하를 얻기 위해 다시 서국 방면으로 군대를 돌려 이이치 성과의 대결에 임했다.

4. 1. 3. 고야마 평정

오사카성 서의 마루에 머물며 도요토미 가문의 가정을 사실상 장악한 이에야스호쿠리쿠를 지배하는 마에다 씨를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규탄했다. 이는 사실무근의 누명이었으나, 마에다 씨는 이에야스에게 순종을 맹세하여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씨에게 반란 혐의를 씌웠고, 순종을 거부하는 우에스기 씨에 대해 아이즈 정벌을 위해 주력군과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동국으로 진출했다.

이에 이이치 성은 도요토미 정권의 명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거병을 알렸다. 이이치 성은 이에야스의 목표가 변방 세력 토벌을 통해 야전 체제 그대로 막부를 여는 것이라 예측하고, 우에스기 씨와 암묵적으로 연합하여 이에야스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이치 성의 봉기는 이에야스의 예상대로였으며, 이에야스의 진정한 목표는 이이치 성에게 역적의 낙인을 찍고 반 도쿠가와 세력을 일거에 토벌하는 것이었다.

시모쓰케국 코야마 평정에서 이에야스는 종군 장수들의 협력을 얻어내고, 반항 세력을 토벌하고 천하를 얻기 위해 서국 방면으로 군대를 돌려 이이치 성과의 대결에 임했다.

4. 2.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정권의 아이즈 정벌군을 교묘하게 자신의 사병, 즉 동군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에야스는 오슈의 다이묘들에게 우에스기 씨를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한편, 이시다 미쓰나리모리, 시마즈, 초소가베 등 서국의 유력 다이묘들을 끌어들여 서군을 결성하고, 긴키의 도쿠가와 측 성들을 함락시키며 동진했다. 이로써 일본 전역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는 전례 없는 대전이 벌어졌다.

동군과 서군은 동서 교통의 요충지인 미노국을 주 전장으로 삼았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 주력은 이에야스보다 먼저 서쪽으로 진군한 동군 선봉 부대와 미노에서 소규모 충돌을 벌였다. 곧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 본대도 미노에 도착했지만,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등을 무시하고 오사카 방면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동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서군 주력을 오가키성에서 이동시켰는데, 이는 이에야스가 의도한 바였다. 이에야스는 전쟁 장기화로 인한 반란을 우려하여 서군 주력을 성 밖으로 유인해 한 번의 전투로 결판을 내려고 했다.

결국 서군은 동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미노 서쪽 끝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 나타났다. 기나이로 들어가는 입구인 이 광활한 들판에서 양군의 주력은 격돌하게 되었다.

동군 7만 5천, 서군 10만이라는 대군이 한 자리에 모여 결전의 막이 올랐다. 서군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신속한 진형 배치가 효과를 거두어 지리적 이점도 얻었지만, 여러 장수들의 발맞춤이 어긋나 전황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계획과는 달리, 전투가 진행되어도 많은 서군 제후들의 부대는 자기 진영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에 서군 장수들에게 치밀한 계략을 펼쳐 많은 장수들의 내응을 확보하고 있었고, 전투가 절정에 달한 후에도 서군에는 자기 진영에서 나서지 않는 부대를 많이 내보냈다. 전군의 기둥으로 미쓰나리가 가장 믿었던 모리 씨도 움직이지 않았고, 서군은 실로 총 병력의 3분의 2가 전황을 지켜보는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이상한 군세가 되었다. 그래도 남은 서군 부대는 필사적으로 분전하여, 적은 병력이었지만 선전하여 차츰 동군을 밀어붙였다. 이 서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대해, 이에야스에게 내응을 약속했던 서군 장수들에게도 동요가 퍼졌다. 미쓰나리는 승리를 확신했지만, 이에야스에게 위협을 받은 서군의 고바야카와대가 갑자기 동군에 투항하여, 우군을 공격했다. 이 고바야카와의 반란을 계기로, 투항을 약속했던 다른 서군 장수들도 잇따라 동군에 가담하여, 서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서군은 총붕괴되었고, 동서 양 진영의 결전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되었지만, 미쓰나리는 재기하려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4. 2. 1. 양측의 배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정권의 아이즈 정벌군을 교묘하게 자신의 사병, 즉 동군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에야스는 오슈의 다이묘들에게 우에스기 씨를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한편, 이시다 미쓰나리모리, 시마즈, 초소가베 등 서국의 유력 다이묘들을 끌어들여 서군을 결성하고, 긴키의 도쿠가와 측 성들을 함락시키며 동진했다. 이로써 일본 전역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는 전례 없는 대전이 벌어졌다.

동군과 서군은 동서 교통의 요충지인 미노국을 주 전장으로 삼았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 주력은 이에야스보다 먼저 서쪽으로 진군한 동군 선봉 부대와 미노에서 소규모 충돌을 벌였다. 곧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 본대도 미노에 도착했지만,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등을 무시하고 오사카 방면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동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서군 주력을 오가키성에서 이동시켰는데, 이는 이에야스가 의도한 바였다. 이에야스는 전쟁 장기화로 인한 반란을 우려하여 서군 주력을 성 밖으로 유인해 한 번의 전투로 결판을 내려고 했다.

결국 서군은 동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미노 서쪽 끝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 나타났다. 기나이로 들어가는 입구인 이 광활한 들판에서 양군의 주력은 격돌하게 되었다.

4. 2. 2. 전투의 시작

동군 7만 5천, 서군 10만이라는 대군이 한 자리에 모여 결전의 막이 올랐다. 서군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신속한 진형 배치가 효과를 거두어 지리적 이점도 얻었지만, 여러 장수들의 발맞춤이 어긋나 전황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계획과는 달리, 전투가 진행되어도 많은 서군 제후들의 부대는 자기 진영을 움직이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에 서군 장수들에게 치밀한 계략을 펼쳐 많은 장수들의 내응을 확보하고 있었고, 전투가 절정에 달한 후에도 서군에는 자기 진영에서 나서지 않는 부대를 많이 내보냈다. 전군의 기둥으로 미쓰나리가 가장 믿었던 모리 씨도 움직이지 않았고, 서군은 실로 총 병력의 3분의 2가 전황을 지켜보는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이상한 군세가 되었다. 그래도 남은 서군 부대는 필사적으로 분전하여, 적은 병력이었지만 선전하여 차츰 동군을 밀어붙였다. 이 서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대해, 이에야스에게 내응을 약속했던 서군 장수들에게도 동요가 퍼졌다. 미쓰나리는 승리를 확신했지만, 이에야스에게 위협을 받은 서군의 고바야카와대가 갑자기 동군에 투항하여, 우군을 공격했다. 이 고바야카와대의 반란을 계기로, 투항을 약속했던 다른 서군 장수들도 잇따라 동군에 가담하여, 서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서군은 총붕괴되었고, 동서 양 진영의 결전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되었지만, 미쓰나리는 재기하려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4. 2. 3.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こばやかわ ひであき/小早川秀秋일본어)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인물이다. 전투 초반, 서군은 수적 우세와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동군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いしだ みつなり/石田三成일본어)의 예상과 달리, 많은 서군 제후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전황을 관망했다. 특히 미쓰나리가 신뢰했던 모리(毛利) 가문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とくがわ いえやす/徳川家康일본어)가 사전에 서군 장수들에게 내응을 약속받는 등 치밀한 계략을 펼친 결과였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에야스의 압박을 받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배신을 결심하고 동군에 가담, 아군이었던 서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배신 행위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로, 강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기점으로, 사전에 내응을 약속했던 다른 서군 장수들도 연이어 동군에 가담하면서 서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를 넘어, 대의를 저버린 배신이 초래한 참담한 결과였다.

결국, 서군은 총체적으로 붕괴되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미쓰나리는 재기를 도모하며 전장에서 이탈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은 권력을 위해 신의를 저버린 행위로,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4. 2. 4. 서군의 붕괴

동군 7만 5천, 서군 10만이라는 대군이 결전을 시작했다. 서군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빠른 진형 배치로 지리적 이점도 얻었지만, 여러 장수들의 발이 맞지 않아 전황이 좋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계획과 달리, 전투가 진행되어도 많은 서군 제후들의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전에 서군 장수들에게 계략을 써서 내응을 확보하고 있었고, 전투가 절정에 달한 후에도 서군에는 움직이지 않는 부대가 많았다. 미쓰나리가 가장 믿었던 모리 씨도 움직이지 않아, 서군은 총 병력의 3분의 2가 전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상한 군대가 되었다.

그래도 남은 서군 부대는 필사적으로 싸워, 적은 병력이었지만 동군을 밀어붙였다. 이 예상 밖의 선전에, 이에야스에게 내응을 약속했던 서군 장수들도 동요했다. 미쓰나리는 승리를 확신했지만, 이에야스에게 위협을 받은 고바야카와대가 갑자기 동군에 투항하여, 우군을 공격했다. 이 반란을 계기로, 투항을 약속했던 다른 서군 장수들도 잇따라 동군에 가담하여, 서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서군은 총붕괴되었고, 동서 양 진영의 결전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되었지만, 미쓰나리는 재기를 위해 전장에서 이탈했다.

4. 2. 5. 전투의 결과

동군 7만 5천, 서군 10만이라는 대군이 결전을 벌였다. 서군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신속한 진형 배치로 지리적 이점도 얻었지만, 여러 장수들의 발이 맞지 않아 전황이 순조롭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계획과는 달리, 전투가 진행되어도 많은 서군 제후들의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전에 서군 장수들에게 치밀한 계략을 펼쳐 많은 장수들의 내응을 확보하고 있었고, 전투가 절정에 달한 후에도 서군에는 자기 진영에서 나서지 않는 부대가 많았다. 전군의 기둥으로 미쓰나리가 가장 믿었던 모리 씨도 움직이지 않았고, 서군은 실로 총 병력의 3분의 2가 전황을 지켜보며 미동도 하지 않는 이상한 군세가 되었다.

그래도 남은 서군 부대는 필사적으로 분전하여, 적은 병력이었지만 선전하며 차츰 동군을 밀어붙였다. 이 서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대해, 이에야스에게 내응을 약속했던 서군 장수들에게도 동요가 퍼졌다. 미쓰나리는 승리를 확신했지만, 이에야스에게 위협을 받은 서군의 고바야카와대가 갑자기 동군에 투항하여, 우군을 공격했다. 이 고바야카와대의 반란을 계기로, 투항을 약속했던 다른 서군 장수들도 잇따라 동군에 가담하여, 서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서군은 총붕괴되었고, 동서 양 진영의 결전의 승패는 여기서 결정되었지만, 미쓰나리는 재기를 위해 전장에서 이탈했다.

4. 3. 전투 이후

홀로 미노국를 빠져나온 이시다 미쓰나리는 목숨을 걸고 오미국의 옛 영지에 도착하여, 영민들의 보호를 받았다. 지친 몸을 쉬면서 미쓰나리는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야망으로부터 도요토미 집안을 지키기 위해, 의(義)를 위해 천하에 대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뜻은 이익을 미끼로 교묘하게 제후들의 욕심을 잡은 이에야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어처구니없게도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정권을 찬탈하려 한 간신(奸臣)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이해관계 앞에서는 의라는 이상은 공론(空論)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과거 미쓰나리의 선정(善政)에 감사하며 사형도 두려워하지 않고 미쓰나리를 숨겨주려는 영민들도 있다. ―― 이윽고 동군(東軍)의 수색대에 미쓰나리의 행방이 드러났다. 여기서 미쓰나리가 도망친다면, 미쓰나리를 숨겨준 이 영민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이 영민들의 목숨을 건 의를 배신하는 짓을 한다면, 미쓰나리는 불의의 무리로 평가되고, 이 대전 또한 불의의 전쟁으로 세상에 해석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 영민들의 의에 응함으로써, 자신의 의거(義挙)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미쓰나리는 자신의 행방을 동군에 알리고, 수색대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와 대면했지만,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곧 미쓰나리는 오사카로 이송되어 시내를 끌려 다녔다. 미쓰나리는 끌려 다니는 와중에도 위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꼿꼿한 모습을 잃지 않고 貫き, 그 후 교토(京)의 육조가와라(六条河原)에서 참수되어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도요토미 정권이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천하는 도쿠가와 씨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태합(太閤) 사후 이에야스의 천하가 될 것이 대세였더라도, 태합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정의의 싸움을 관철했다는 점에서 미쓰나리는 「성공」했다고, 마지막 장에서 구로다 요스이(黒田如水)는 하츠메에게 논평했다.

4. 3. 1. 이시다 미쓰나리의 최후

홀로 미노국를 빠져나온 이시다 미쓰나리는 목숨을 걸고 오미국의 옛 영지에 도착하여, 영민들의 보호를 받았다. 지친 몸을 쉬면서 미쓰나리는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야망으로부터 도요토미 집안을 지키기 위해, 의(義)를 위해 천하에 대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뜻은 이익을 미끼로 교묘하게 제후들의 욕심을 잡은 이에야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어처구니없게도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정권을 찬탈하려 한 간신(奸臣)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이해관계 앞에서는 의라는 이상은 공론(空論)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과거 미쓰나리의 선정(善政)에 감사하며 사형도 두려워하지 않고 미쓰나리를 숨겨주려는 영민들도 있다. ―― 이윽고 동군(東軍)의 수색대에 미쓰나리의 행방이 드러났다. 여기서 미쓰나리가 도망친다면, 미쓰나리를 숨겨준 이 영민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이 영민들의 목숨을 건 의를 배신하는 짓을 한다면, 미쓰나리는 불의의 무리로 평가되고, 이 대전 또한 불의의 전쟁으로 세상에 해석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 영민들의 의에 응함으로써, 자신의 의거(義挙)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미쓰나리는 자신의 행방을 동군에 알리고, 수색대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와 대면했지만,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곧 미쓰나리는 오사카로 이송되어 시내를 끌려 다녔다. 미쓰나리는 끌려 다니는 와중에도 위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꼿꼿한 모습을 잃지 않고 貫き, 그 후 교토(京)의 육조가와라(六条河原)에서 참수되어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도요토미 정권이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천하는 도쿠가와 씨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태합(太閤) 사후 이에야스의 천하가 될 것이 대세였더라도, 태합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정의의 싸움을 관철했다는 점에서 미쓰나리는 「성공」했다고, 마지막 장에서 구로다 요스이(黒田如水)는 하츠메에게 논평했다.

4. 3. 2.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일본 전국을 제패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축한 권력 구도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지배 질서를 확립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존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장기적인 안정 통치를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다. 이는 일본 역사에서 근세 시대를 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으며, 이후 260여 년간 지속된 에도 시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5. 세키가하라 전투의 영향

5. 1. 정치적 영향

5. 2. 사회적 영향

5. 3. 문화적 영향

6. 세키가하라 전투 관련 창작물


  • 소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룬 역사 소설이다. 1966년에 간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02년 청어람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오사카 전투를 소재로 한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 《'''성채'''》는 본작의 속편에 해당한다.

  • 영상 작품


1981년 T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세키가하라》는 시바 료타로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야사카 아키라가 각본을,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음악을 담당했다. 오야마 가쓰미가 제작하고, 다카하시 이치로와 가모시타 신이치가 연출을 맡았다. 모리시게 히사야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을, 가토 고가 이시다 미쓰나리 역을 맡았으며, 미쿠니 렌타로가 혼다 마사노부 역을, 미후네 도시로가 시마 사콘 역을 연기했다. 마쓰자카 게이코가 하쓰메 역, 호소카와 도시유키가 나오에 가네쓰구 역을 맡았고, 이시자카 고지가 나레이션을 담당했다.

2017년에는 하라다 마토 감독, 오카다 준이치 주연의 영화 《세키가하라 대전투》가 도호를 통해 개봉되었다. 오카다 준이치는 이시다 미쓰나리 역을 맡았다.

6. 1. 소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룬 역사 소설이다. 1966년에 간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02년 청어람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오사카 전투를 소재로 한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 《'''성채'''》는 본작의 속편에 해당한다.

6. 2. 영상 작품

1981년 T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세키가하라》는 시바 료타로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야사카 아키라가 각본을, 야마모토 나오즈미가 음악을 담당했다.[3] 오야마 가쓰미가 제작하고, 다카하시 이치로와 가모시타 신이치가 연출을 맡았다.[3] 모리시게 히사야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을, 가토 고가 이시다 미쓰나리 역을 맡았으며, 미쿠니 렌타로가 혼다 마사노부 역을, 미후네 도시로가 시마 사콘 역을 연기했다.[3] 마쓰자카 게이코가 하쓰메 역, 호소카와 도시유키가 나오에 가네쓰구 역을 맡았고, 이시자카 고지가 나레이션을 담당했다.[3]

2017년에는 하라다 마토 감독, 오카다 준이치 주연의 영화 《세키가하라 대전투》가 도호를 통해 개봉되었다.[4] 오카다 준이치는 이시다 미쓰나리 역을 맡았다.[4]

참조

[1] 웹사이트 関ヶ原 第一夜 夢のまた夢|ドラマ・時代劇|TBSチャンネル - TBS https://www.tbs.co.j[...] 2023-05-14
[2] 웹사이트 関ヶ原 https://www.asmik-ac[...] 2023-05-14
[3] 웹사이트 TBS創立30周年記念ドラマ「関ヶ原」三部作配信-TBSオンデマンド https://navicon.jp/n[...] 2023-05-07
[4] 뉴스 岡田准一と原田眞人が「関ヶ原」映画化で初タッグ、共演に役所広司と有村架純 https://natalie.mu/e[...] 2016-08-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